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8월 15일 정오 라디오 앞에서 쓰러져 우는 소년들의 모습을 담은 이 사진은 45년 8월 16일 『훗카이도 신문』에 실렸다. 이후에도 이 사진은 8월 15일 종전의 기억을 담은 유명한 사진으로 곳곳에 인용된 바 있다. 그런데 이 사진은 1995년 사진기자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왜 50년의 세월 동안 어느 누구도 이 사진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을까? 이 책의 첫 번째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미디어 특히 사진은 정지의 화상을 담고 있기 때문에 객관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흔히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롤랑 바르트는 이미지의 수사에서 사진에 붙는 글의 기능을 크게 고정과 연결로 나누었다. 그에 따르면 이미지 자체는 의미가 없다,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함의의 코드이다. 설사 사진 이미지에 어떤 기의가 붙어 있다 해도, 그 기의는 불안정하게 떠다니고 있으므로 고정시켜줄 필요가 있다. 그 기능을 하는 것이 고정이다. 예를 들어 신문사진에 붙는 설명이나 작품의 제목이 고정의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고정기능은 사진의 의미를 특정한 층위로 한정시킬 뿐 아니라 사진에 대한 해석의 방향마저 정한다. 이렇듯 사진은 고정기능과 합치되면서 현실의 사실적 재현 기록이나 사실보다는 허구로서의 실제에 더 가까워지게 된다. 개인 또는 집단의 의식이 반영되어 제시되는 것이다. 즉, 사진은 사각의 틀이라는 특정된 프레임 안에 개인 혹은 집단의 의식을 담아내는, 그렇기 때문에 의도된 특정된 의미가 부여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를 우리는 선전 사진 속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영화 이오지마의 깃발로 유명한 이오지마의 점령 사진이라든지 소련의 독일제국 의사당 점령 사진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사진과 마찬가지로 위에서 언급한 일본 천황의 포츠담 선언 수락 방송을 듣고 쓰러져 우는 소년들의 이미지는 개개인의 사람마다 달랐을 8월 15일의 기억들을 하나의 집단화된 기억으로 형상화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집단의 기억은 오봉 라디오 방송 및 언론의 보도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전후세대는 물론 이후 세대의 기억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것이 이 책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다.
대부분의 나라의 역사교과서에서는 일본의 패전일을 9월 2일 미주리호에서의 항복문서 조인으로 적고 있다. 즉, 8월 15일은 태평양 전쟁의 실제적인 패전일이 아니다. 역사의 흐름을 보면 8월 10일 천황은 이미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였고 14일 항복조서에 서명하였다. 이후 9월 2일 미일 양국 간에 항복문서 조인으로 전쟁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전쟁의 정확한 끝을 언제로 봐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엇갈리지만 기본적으로 8월 15일은 단지 종전조서의 라디오 방송이 있던 날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우리들조차 8월 15일을 태평양전쟁의 종전일로 기억하고 있다. 저자 또한 머리말에서 ‘나는 내가 태어난 해인 1960년보다 3년이나 늦은 1963년에 8월 15일이 법적인 지위를 얻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라고 적고 있다. 일반인도 아닌 사학을 전공한 저자의 이러한 무지는 전후 일본인들의 역사 무지를 일반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인들의 무지에 대해 저자는 의도적으로 선택된 기억의 집단 형상화 때문이며 이를 부추긴 것은 언론들. 즉 ‘8월 저널리즘’이라는 일련의 행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전후 일본은 8월 15일의 기억 형상화에 열을 올렸을까? 왜 다른 날들을 다 제쳐두고 8월 15일일까? 왜냐하면 첫 번째로 일본에게 있어 9월 2일 미주리호에서의 항복문서 조인은 외면해야할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어키베 마코토의 『전쟁, 점령, 강화』를 인용하여 ‘그날이 그들 미군에게 대일전승의 날(VJ데이)이면 우리 황군에게는 일본 개벽 이래의 불명예의 날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적고 있다. 즉 일본의 지도자들에게 9월 2일은 씻을 수 없는 치욕의 기억이었고 망각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전후 일본 소설인 히야시 후미코의 『뜬구름』에서는 패전 직후의 참담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소설 속 도쿄의 모습은 ‘밤이어서 그런지 어느 얼굴에도 기력이 없고 어떤 얼굴에도 혈색이 없다 저항의 기색이 없는 얼굴의 좁은 열차 안에 겹쳐있었다. 노예 열차 같은 기분도 들었다. …… 컴컴한 차창 밖의 산하에도 피로한 흔적의 처참한 형상만 계속 이어져 있었다.’와 같이 기력도 저항의 기색도 없는 황폐해진 모습이다. 이러한 참담한 패전의 모습은 일본 국민들 특히 보수층들에게 담아두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 9월 2일은 의도적으로 삭제되고 천황의 성단을 받는 신민들의 이미지와 기억들로 조작된 8월 15일을 의도적으로 내세운 것이다.
두 번째로 8월 15일에 대하여 패전(敗戰)대신 종전(終戰)이라는 단어의 사용하는 것에서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일본은 패전(敗戰)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피하고 종전(終戰)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한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패전은 전쟁에서 패했다는 의미이고 종전은 전쟁을 끝냈다는 의미이다. 어찌 보면 비슷한 의미의 나열일수도 있지만 두 단어에 담긴 정치적 함의는 매우 다르다. 패전(敗戰) 즉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시작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일본 천황 및 군부세력이 전쟁책임을 져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종전(終戰), 전쟁을 끝냈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어쩔 수 없이 항복한다는 것이 아닌 능동적으로 전쟁을 그만두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우리는 아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있지만, 피폐해진 일본 국민들을 위해 전쟁을 마무리 지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의식은 ‘일억 총참회론’으로 더욱 강화된다. 45년 8월 26일 히가시쿠니 수상은 기자회견에서 ‘일억 총 참회’를 언급한다. 여기서 가장 먼저 짚어두어야 할 것은 무모한 침략전쟁을 벌였다는 데 대한 반성이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전쟁의 패인으로 들고 있는 것은 전력의 급속한 괴멸, 원자폭탄의 출현과 소련의 진출, 우리나라에 적합하지 않은 통제, 정부 관리 군인이 국가의 동맥경화를 일으킨 일, 국민 도덕의 저하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총 참회론’이 히로히토에게 바쳐짐으로써 일본이 국가의 이름으로 행한 침략전쟁의 책임, 특히 중국을 비롯한 침략전쟁의 피해를 당한 광범위한 아시아 지역 사람들에 대한 가해책임을 회피하는 천황과 국민의 담합적인 담론상의 닫힌 관계가 구축되었다. 일군인 히로히토가 자신의 이름으로 만민에게 평화를 준다. 그것을 고맙게 받는 만민은 일군에게 전쟁에 패한 것을 참회한다. 외부를 완전히 배제하고 안쪽으로 닫힌 패전 책임의 거울에 비친 상과도 같은 구도가 히가시쿠니의 발언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이후 히가시쿠니 수상은 항복문서에 조인한지 나흘 후 열린 제88차 제국의회에서 ‘종전에 이른 경의 개요보고’를 하면서 ‘일억 총참회론’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이 보고는 극히 충실하게 종전조서를 기본적인 틀로 하면서 그 틀 안에서 ‘정전(征戰) 4년’을 역사화하고 있다. 이는 전쟁을 태평양전쟁으로만 축소시키면서 만주사변 이후의 중국에서 치른 전쟁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이는 직접적인 패전을 안겨준 미·영 연합군에 대해서만 어쩔 수없이 항복한다는 인상을 가져다준다. 동시에 히로히토의 전쟁책임은 교묘한 수사를 통해 회피하고 있다. 히로히토가 “정부에 대해 백방의 수단을 다하여 교섭을 원활히 매듭지으라는 편달을 내리셨고 참례한 제원 일동은 광대무변한 천황의 마음에 숙연하게 옷깃을 여미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라고 개전 전의 어전회의에 대한 정보를 매듭지은 다음 곧바로 “천황 폐하의 이 마음은 개전 후에도 시종 달라지지 않고 항상 세계 평화의 확립에 대해 말씀해 오신바, 넓고도 깊이 염려하셨습니다.” 라고 잇고 있다. 다시 말해 히로히토는 전쟁과 사실상 무관하며 평화주의자였던 거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곧바로 이번의 새로운 사태의 출현에 의해 불행하게 우리나라는 비상조치로써 대동아전쟁 국면을 매듭짓게 되었습니다만, 이 역시 참으로 세계평화에 깊이 마음을 두시는 천황의 폐하의 인자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라고 종전조서가 천황의 마음에서 나온 인자한 마음으로 상찬되었다. 쇼와 천황 히로히토의 인자함과 신민에 대한 자애라는 고마운 은총에 의해 종전이라는 상찬이 주어졌다는 논리가 강조된 것이다. 이어 계속해서 현실을 전도하는 중요한 논리가 등장한다. 그것은 천황이 성단을 내릴 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괴로워한 일에 대해 신민측이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때의 반성은 천황의 마음을 괴롭게 했다는 그 자체에 대한 반성이다. 즉 전쟁 자체에 대한 반성이나 전쟁 피해국들에 대한 책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패전 직후 일본 지배층의 생각이 언론들의 8월 저널리즘으로 나타났고 8월 15일은 오봉이 아니라 종전 기념일로 바뀌는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이상이 왜 9월 2일이 아니고 8월 15일이냐는 저자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에 대해 저자는 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전후체제 탈피를 위한 의도된 노력이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파악되는데 그 중 53년 1월 9일 개봉된 영화 「히메유리의 탑」은 이러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일본에서 반전영화로 받아들여졌는데 내용을 보면 일본이 벌인 전쟁을 비판하는 내러티브가 아니라 - 물론 민간인과 부상병을 희생시키는 악한 군인들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일부의 잘못에 불과할 뿐 전쟁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 일본의 여성들이 전쟁을 통해 어떠한 피해를 입었는지 상기하는 전장 로망식의 그것이 반전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반전이라는 단어를 전면에서 내세우면서 스크린에 비쳐지는 것은 순진무구한 여학생으로 표상된 일본과 국가를 위해 죽는 ‘자결행위’의 상찬이라는 기존의 가치를 지키려는 보수적인 장면인 것이다. 또한 오키나와와 일본의 대립을 뛰어넘는 하나의 공동체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도 이 내러티브를 선호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미군의 공격에 습격당하고 희생당한 일본인과 오키나와인은 그 차이와 대립을 망각된 채 하나의 일본인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내러티브는 반복적으로 사용되며 일본의 피해자 의식 확산을 기여를 하게 된다. 필자가 글 서두에서 언급한 사진처럼 말이다.
이러한 매체들의 반응은 소위 55년 체제로 불리는 일본의 보수화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일본의 보수주의자들은 1958년 일본정부는 경제백서를 통하여 경제적 차원의 전후 종언을 선언했고 1980년대 나카소네 수상은 정치적 차원의 전후 종언을 의미하는 ‘전후 정치의 총 결산’을 내걸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본 내부에는 전후 체제가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평화헌법과 미일 안보동맹이라는 일본 ‘국가’의 제약이 따르는 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보수주의자들에게 전후체제는 허구적 세계이며 파괴되어야 할 세계이다. 보수정치학자 나카시니 데루마사는 전후체제가 평화헌법의 커다란 거짓위에 성립했다고 본다. 군사력 보유 금지와 전쟁 포기를 규정한 평화헌법 제9조는 완전한 거짓말이며 이러한 평화헌법 위에 성립한 전후 민주주의는 거짓말 위에 거짓말을 굳히는 작업이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전후 60년은 일본 문명의 생명력이 쇠락해온 문명사적 위기의 60년이었다고 진단한다. 문명사적 위기는 안전보장, 국민정신, 황실의 존재방식의 위기를 가리킨다. 일본의 보수정권은 이러한 일본 국가의 국제적 수동성을 극복하기 위해 보수의 국민화를 시도했다. 이는 특히 1980년대 나카소네 정권이 경제대국의 자신감 아래 국민적 자부심을 정치화하고자 했을 때 분명히 들어났다. 그리고 이는 역사 교과서 파동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일본의 침략’을 ‘진출’이나 그 외의 다른 용어로 바꾸게 하고 난징대학살에 대한 기술은 ‘환란중에 일어난 것’이라고 쓰도록 수정하고 731부대 관련 기술은 삭제시켰다. 이는 국내외의 비판을 받아 80년대 후반 이후 다시 침략에 대한 기술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적어도 20년 이상 일본 청소년들에게 일본의 침략 가해사실을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교과서 파동은 96년 이후 ‘새역모’에 의해 다시 진행되었다. 비록 이는 국내외의 비판을 받아 채택율이 극소화됨에 따라 수면 밑으로 가라앉기는 했지만, 여전히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다.
여기에 덧붙여 저자는 이러한 일본사 교과서 문제에 대하여 특히 종전 기술의 변화에 집중하여 적고 있다. 이를 보면 55년 체제의 정착이 이루어지는 63년까지는 9월 2일 종전 기술이 교과서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65년 이후에는 8월 15일 종전 기술이 대다수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저자가 적고 있듯 세계사 교과서가 일본 표준에 의해 기술이 되는 기묘한 뒤틀림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왜 아직도 8월 15일의 신화에 매달려 있느냐는 저자의 마지막 질문이 나온다.
이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 8월 15일의 신화는 일본 보수층의 불안을 기저에 깔고 있는 것이다. 불안감의 원인은 일본 사회가 공동체적 윤리와 국가 의식을 상실했다는 판단, 미일 안보동맹과 평화헌법이라는 제도와 진보주의라는 이념으로 분식된 전후체제가 이를 초래했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일본국헌법 ‘평화’ 조항의 명분과 실제 사이에서 나타난 ‘비틀림’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전후체제가 만들어낸 체제 이데올로기와 실제 사이의 ‘어긋남’을 추궁한다. 이 ‘비틀림’과 ‘어긋남’은 전후체제를 부정하는 강력한 심리적 근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평화헌법의 제정의 강제성, 비주체성과 미일안보동맹의 보호성, 의존성이 국가로서 판단능력 상실, 국가의식의 약화를 초래했다는 인식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기저에는 완전한 주권체라는 주체의 문제가 깔려있다.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주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근대적 주체를 해체하고 역사적 국가관에 의존한 근대적 국가를 상정하려 한다. 강한 국가는 일본 보수주의자들의 탄생지이자 지향점이다. 즉, 8월 15일의 신화라는 허구에 매달려 있는 이유는 일본은 전쟁의 피해자이며 ‘일억 총참회’와 같이 반성을 통해 천황 아래로의 강한 국가의 재도약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적 국가의 구축은 협력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국제사회에서 결국 붕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자기를 보편으로 생각하는 역사관 및 세계관은 충돌을 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붕괴는 일본은 물론 주변 아시아 및 세계에 큰 파국을 다시 한 번 미칠 것이기에 그 문제점이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8월 15일이라는 허구의 신화 추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8월 15일을 당연하게 광복절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과연 8월 15일은 우리에게 광복절인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일 선전포고를 통해 항전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럼에도 임정은 한반도 진공작전의 불발로 연합국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였고 한반도는 8월 15일 수동적으로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우리는 일본에게 제대로 된 배상을 받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종군 위안부 문제나 독도 영유권 문제로 갈등을 계속 빚어왔다. 더욱이 8월 15일 발표된 종전조서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쟁책임을 회피하고 식민지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의 피해를 회피한 것이었다. 즉, 우리가 정치, 군사적으로는 독립을 이룩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8월 15일 제대로 된 광복을 맞이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8월 15일을 어떻게 생각하여 하는가? 혹은 그럼 광복의 시점으로 잡아야하는가? 그것은 논쟁이 심한 주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건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광복을 맞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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