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식민지 바라보기 - 제국주의 : 신화와 현실 서평

박지향 <<제국주의 : 신화와 현실>>


제국주의는 19세기 이후 지금까지 흔히 통용되어 오는 말이지만 그 범위가 넓고 방대해서 정확한 개념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것이 사실이다이에 박지향 교수는 본 책에서 제국주의의 핵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짓는다제국주의는 다른 집단에 의한 민족이나 인종의 통제이며 그 통제는 우선적으로 정치적이거나 경제적 통제이며국가들의 종속적 관계 성립과 유지를 의미하며 반드시 공식적인 영토의 통제를 포함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제국주의와 구별된다고 말한다.


이후 이어지는 여러 장을 통해 저자는 ,특히 1870년대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전개된 신 제국주의에 집중하여,경제적정치적문화적 분석 등을 통한 제국주의의 여러 가지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이 중 경제적 분석은 기존 학계에서 통용되어 온 수탈론적 분석에서 벗어난 보다 열린 시각을 보여준다기존 학계의 시각이 수탈구조를 통한 제국의 구조 형성에 초점을 맞추어진데 반해 제국의 유지에 경제성이 큰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다는 저자의 견해는 하나의 센세이션으로 다가온다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식민지 수탈론이 최근까지 주류를 이루어 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기존 학계에서 통용되어온 식민지 수탈론은 탈 식민에 급급한 나머지 예정된 결론으로 의지된 도덕적 결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식민지 사회는 소수의 지배자와 다수의 피지배자로 구성된 사회였으며 이러한 사회구조는 상호간의 협력이 없이는 언제나 붕괴 가능한 구조였다고 할 수 있다그럼에도 서양의 식민지들은 물론이고 민족적 결집력이 강했던특이한 케이스인 식민지 조선의 경우에도 오랫동안 유지 될 수 있었던 것은 식민지 사회 내에서 저항은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저자가 규정하는 적극적 협력자이외에도 대다수의 일반 민중들이 저항을 하지 않았던 것은 식민지 이전 사회와 식민지 사회의 지배 구조가 그들에게 유달리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지배자가 외국인으로 바뀌었을 뿐 피지배자가 느끼는 수탈 구조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언정 큰 차이는 없었기 때문이었다도리어 식민지 사회에 전개된 문명화의 산물들은 조금이나마 식민지 민중들에게 영향을 끼쳤고그것들은 이전 사회보다 긍정적인 결과로 다가온 것이 사실이다그렇지만 식민 독립 후 성립된 국가 지배층들은 탈 식민을 통한 국가 정체성 확립에 나설 필요가 있었고 기존의 이러한 사실들은 어느 정도 무시된 것도 사실이다그렇지만 이러한 수탈론적 시각은 여타 정치적 상황과 결부되어 제국주의와는 또 다른 민족주의로 치달은 경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그러한 점에서 저자의 이러한 시점은 다소 적용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새로운 지점을 최초로 밟았다는 데에서 충분히 환영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제국주의가 경제적으로 제국에 큰 이득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면 제국들은 이러한 구조를 왜 계속 유지해나갔는가라는 것이다저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제국주의의 문화적 측면을 바라보고 있다그리고 이러한 측면을 살펴보기에 앞서 왜 이러한 측면이 도래되었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영국 제국주의는 1870년대 이후 어떠한 정파를 가리지 않고 널리 퍼지는 양상을 보였다제국주의는 보수당의 정치이념이었지만 동시에 자유당에게도 환영받았으며 심지어 공산주의 계열들도 제국주의에 동조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이러한 정파를 뛰어넘은 제국주의의 지지와 확산은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그것은 식민지야 말로 새롭고 활동적인 추진력을 제공받아 상처받은 남성성의 회복을 꾀할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실제로 백인 정착지에서 지주세력의 주도 아래 영국적 사회 위계를 만들고 영국식 전원 풍경을 조성하려는 움직임이 널리 포착된다이들은 시골저택과 농장사냥 그리고 도시의 클럽하우스 모국의 생활스타일을 그대로 재현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사냥은 영국의 군사적인 힘경제적인 힘정치적인 힘을 보여주는 위엄의 상징이자 고귀한 스포츠였다.역사가 멕켄지는 당시 사냥을 19세기말 식민지 지배의 제국적인 위엄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말했다제국의 시대에 사냥은 제국주의 국가의 남성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스포츠이자 유사시에는 국가적인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 용기 인내 개성을 육성하는 교육적인 성격도 갖추었다결국 식민지는 특히 여성과 원주민들의 열등함에 관한 가정에 기초하여 권력과 특권을 누리고 있는 백인 남성들 간 우애를 펼칠 수 있는 자유로운 장소로서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이러한 남성상은 그들 스스로 황소와 같이 일하고 굽히지 않고 실패하지 않으며 기계와 같은 정확성으로 그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으로 묘사하였는데 저자는 그러한 모습을 다 자란 사립학교 소년의 모습으로 표현하며빅토리아 말기의 남성성이 자기도취정서적 미성숙자기희생으로 점철된 것은 결핍된 남성성의 발현이라고 규정짓는다그리고 결핍된 남성성은 그러한 결핍성을 감추기 위해 문명화의 사명이라든지 위대한 국가의 건설이라든지 하는 거대 담론을 통해 우수한 백인들과 열등한 원주민들이라는 계층구조를 형성해내고 결핍성을 보충하려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식민지 지배에 내재된 젠더성은 여러 가지 측면애서 드러나는데 시인 키플링은 노래(The song)에서 클라이브에 의해 정복된 도시 마드라스를 클라이브가 나의 입술과 눈과 이마에 입 맞춘다아 황홀한 키스여라고 표현함으로서 식민지에 투영된 복종적이고 애욕의 대상으로서 측면을 강하게 드러낸다이러한 식민지 정체성 형성은 수동적‘ 힌두, ’무법의 무슬림혹은 남성적‘ 펀잡인과 나약한‘ 벵골인 등의 모습을 통해 원주민들을 다양한 집단들로 분류하고 계층화함으로서 더욱 심화되었다특히 식민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인 원주민들의 신체적 기형에 집중하여 그들을 분류하고 지배자들의 상대적 우위성을 강화하려는 측면이 강했다이때 특히 활용된 것이 바로 성기(性器)였다크리스토프 마이너스는 몸을 통해 본 인종의 위계가 결국 성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측면을 분명하게 제시한 바 있다그는 소위 해부학적 사실로 지구상의 다양한 인종의 성기를 분류했다그에 따르면 예를 들어 동북아시아의 남성은 매우 작은 성기를 가진 반면 여성은 매우 큰 성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여성들이 자기 종족의 남성을 경멸하고 러시아인이나 코사크인들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성욕(性慾)은 19세기 유럽에서 가장 민감한 주제였고 그만큼 담론의 생산이 통제된감추어진 영역이었다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성기(性器)에 대한 집착은 성욕(性慾)을 수량화하고 위계를 매기기 위한 목적이 깔려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그런데 여기서 위계를 매기는 데 있어 왜 성기라는 몸의 특정부분에 주목했는가를 따져보자성기는 몸에서도 가장 보기 힘든 부분이다따라서 성기에 담론이 집중된 것은 이 보이지 않는 부분이 담론을 생산함에 있어 가장 통제가 용이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국주의의 직접적 시작은 문화적 동기가 아닐지라도그 확산의 기저에는 문화적 동기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체성을 부여하고 계층화한다고 해서 식민지 지배가 수월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이러한 차별적 요소는 결국 식민지 경영에 있어 제국에 큰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그럼에도 제국은 꽤 오랜 기간 유지되어 왔다그렇다면 제국은 어떻게 유지되었는가?그것은 바로 협력자들의 존재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기실 우리는 식민지 내 협력자 문제에 민감한 측면이 있어왔다그것은 독립 후 반민특위의 해산과 이후 유지되어온 식민지 협력자들의 정치경제적 지배력 등 적극적 협력파의 청산문제의 미해결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식민지 협력자들을 다룸에 있어 그들은 배타적 하나의 계층으로서 형성하고 다루어왔다이러한 흐름에 대해 저자는 저항을 하지 않으면 모두 협력자라고 보는 견해라고 비판을 가한다.


저자의 견해를 비롯한 최근의 연구 성과들은 협력자들에 대해 기존의 단향성 접근에서 양방향성 접근론으로 변화하고 있는데양방향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접근방법은 일방적으로 종속되고 지배되었다고 간주되어온 식민지 주민들을 보다 적극적인 행위자로 복구시키려는 의도의 발현이기도 하다그것은 나아가 식민지배자와 종속민 모두에서 다양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는 즉 지배자의 태도에는 동화와 배제라는 두 가지 방식이 동시에 존재했으며 종속민에게도 저항과 함께 지배자를 모방하려는 모습이 발견된다는 것이다이러한 모방이라는 요소는 독립 후 새로운 국가건설의 임무를 떠맡은 탈식민 사회 엘리트들에게 있어 식민지배자들의 국가조직을 넘겨받아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저자는 이것은 제국주의가 공헌한역사적인 아이러니라고 표현한다물론 이러한 표현은 식민 극복이라는 우리의 정서에 도전적으로 다가오지만강제적으로라도 자유주의 사회를 이식 받은 식민지 경험그것이 비록 형식적이라고 비판 받을 수도 있겠지만과 모방은 기존 봉건사회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법에 의한 통치였으며 민족의 형성에 영향을 미쳐 새로운 국가 형성에 있어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국주의는 심각한 유산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것은 국가주의이다즉 제국주의가 국가 권력의 팽창현상이었다는 점에서 그 유산은 무엇보다도 국가주의의 발달과 강화로 나타났다제국주의에 저항한 사람들조차 국가주의의 유산을 답습하였다한편으로 독립의 요구가 외국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이었다면 다른 수준에서 그것은 이방인 지배가 취한 구조와 이념적 형태를 그대로 수용하고 확인하는 것이었다민족주의자들이 제국의 경험을 충실히 답습함으로써 독립 후 국가는 또 다른 억압적 존재로 부상하고 개인적 자유의 희생을 강요하는 현상이 야기되었다민족주의는 제국주의의 역사적 계승자이며 그것이 대체하려고 한 제국주의 전도된 이미지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36년에 이르는 오랜 식민지배 경험을 가지고 있다또한 징병징용 등 수많은 상해를 당했다그리고 독립은 식민지 내 저항과 상관없이 강대국들의 조정 속에서 갑자기 부여된 것이었다결국 우리 스스로 식민 경험에 대한 성찰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하지 못하고 감정적 결론에 치중한 바가 크다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맹아론 같은 끼워 맞추기식 기술은 식민의 기억에 벗어나기 위한 태도에 불과하다그렇기 때문에 박지향 교수의 견해는 일견 도발적으로 보이기도 한다물론 그의 견해는 영국사에 집중된 것이고 그에 따른 보편적 해석은 다소 무리가 따른다고 생각한다그럼에도 그의 견해는 일방론적 방향으로 흐르고 있던 학계의 논의들을 다른 방향으로도 볼 수 있게 방향 점을 던졌다는 점에서 충분히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8월 15일의 신화 - 우리는 진정한 광복을 이루었는가. 서평


8월 15일의 신화 - 사토 다쿠미 지음
















1학기 일본 근현대사 수업 과제로 냈던 서평입니다.

지금 벌어지는 상황에 생각나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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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815일 정오 라디오 앞에서 쓰러져 우는 소년들의 모습을 담은 이 사진은 45816훗카이도 신문에 실렸다. 이후에도 이 사진은 815일 종전의 기억을 담은 유명한 사진으로 곳곳에 인용된 바 있다. 그런데 이 사진은 1995년 사진기자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50년의 세월 동안 어느 누구도 이 사진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을까? 이 책의 첫 번째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미디어 특히 사진은 정지의 화상을 담고 있기 때문에 객관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흔히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롤랑 바르트는 이미지의 수사에서 사진에 붙는 글의 기능을 크게 고정과 연결로 나누었다. 그에 따르면 이미지 자체는 의미가 없다,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함의의 코드이다. 설사 사진 이미지에 어떤 기의가 붙어 있다 해도, 그 기의는 불안정하게 떠다니고 있으므로 고정시켜줄 필요가 있다. 그 기능을 하는 것이 고정이다. 예를 들어 신문사진에 붙는 설명이나 작품의 제목이 고정의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고정기능은 사진의 의미를 특정한 층위로 한정시킬 뿐 아니라 사진에 대한 해석의 방향마저 정한다. 이렇듯 사진은 고정기능과 합치되면서 현실의 사실적 재현 기록이나 사실보다는 허구로서의 실제에 더 가까워지게 된다. 개인 또는 집단의 의식이 반영되어 제시되는 것이다. , 사진은 사각의 틀이라는 특정된 프레임 안에 개인 혹은 집단의 의식을 담아내는, 그렇기 때문에 의도된 특정된 의미가 부여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를 우리는 선전 사진 속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영화 이오지마의 깃발로 유명한 이오지마의 점령 사진이라든지 소련의 독일제국 의사당 점령 사진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사진과 마찬가지로 위에서 언급한 일본 천황의 포츠담 선언 수락 방송을 듣고 쓰러져 우는 소년들의 이미지는 개개인의 사람마다 달랐을 815일의 기억들을 하나의 집단화된 기억으로 형상화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집단의 기억은 오봉 라디오 방송 및 언론의 보도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전후세대는 물론 이후 세대의 기억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것이 이 책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다.

대부분의 나라의 역사교과서에서는 일본의 패전일을 92일 미주리호에서의 항복문서 조인으로 적고 있다. , 815일은 태평양 전쟁의 실제적인 패전일이 아니다. 역사의 흐름을 보면 810일 천황은 이미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였고 14일 항복조서에 서명하였다. 이후 92일 미일 양국 간에 항복문서 조인으로 전쟁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전쟁의 정확한 끝을 언제로 봐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엇갈리지만 기본적으로 815일은 단지 종전조서의 라디오 방송이 있던 날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우리들조차 815일을 태평양전쟁의 종전일로 기억하고 있다. 저자 또한 머리말에서 나는 내가 태어난 해인 1960년보다 3년이나 늦은 1963년에 815일이 법적인 지위를 얻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라고 적고 있다. 일반인도 아닌 사학을 전공한 저자의 이러한 무지는 전후 일본인들의 역사 무지를 일반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인들의 무지에 대해 저자는 의도적으로 선택된 기억의 집단 형상화 때문이며 이를 부추긴 것은 언론들. ‘8월 저널리즘이라는 일련의 행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전후 일본은 815일의 기억 형상화에 열을 올렸을까? 왜 다른 날들을 다 제쳐두고 815일일까? 왜냐하면 첫 번째로 일본에게 있어 92일 미주리호에서의 항복문서 조인은 외면해야할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어키베 마코토의 전쟁, 점령, 강화를 인용하여 그날이 그들 미군에게 대일전승의 날(VJ데이)이면 우리 황군에게는 일본 개벽 이래의 불명예의 날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적고 있다. 즉 일본의 지도자들에게 92일은 씻을 수 없는 치욕의 기억이었고 망각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전후 일본 소설인 히야시 후미코의 뜬구름에서는 패전 직후의 참담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소설 속 도쿄의 모습은 밤이어서 그런지 어느 얼굴에도 기력이 없고 어떤 얼굴에도 혈색이 없다 저항의 기색이 없는 얼굴의 좁은 열차 안에 겹쳐있었다. 노예 열차 같은 기분도 들었다. …… 컴컴한 차창 밖의 산하에도 피로한 흔적의 처참한 형상만 계속 이어져 있었다.’와 같이 기력도 저항의 기색도 없는 황폐해진 모습이다. 이러한 참담한 패전의 모습은 일본 국민들 특히 보수층들에게 담아두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 92일은 의도적으로 삭제되고 천황의 성단을 받는 신민들의 이미지와 기억들로 조작된 815일을 의도적으로 내세운 것이다.

두 번째로 815일에 대하여 패전(敗戰)대신 종전(終戰)이라는 단어의 사용하는 것에서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일본은 패전(敗戰)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피하고 종전(終戰)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한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패전은 전쟁에서 패했다는 의미이고 종전은 전쟁을 끝냈다는 의미이다. 어찌 보면 비슷한 의미의 나열일수도 있지만 두 단어에 담긴 정치적 함의는 매우 다르다. 패전(敗戰) 즉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시작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일본 천황 및 군부세력이 전쟁책임을 져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종전(終戰), 전쟁을 끝냈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어쩔 수 없이 항복한다는 것이 아닌 능동적으로 전쟁을 그만두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우리는 아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있지만, 피폐해진 일본 국민들을 위해 전쟁을 마무리 지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의식은 일억 총참회론으로 더욱 강화된다. 45826일 히가시쿠니 수상은 기자회견에서 일억 총 참회를 언급한다. 여기서 가장 먼저 짚어두어야 할 것은 무모한 침략전쟁을 벌였다는 데 대한 반성이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전쟁의 패인으로 들고 있는 것은 전력의 급속한 괴멸, 원자폭탄의 출현과 소련의 진출, 우리나라에 적합하지 않은 통제, 정부 관리 군인이 국가의 동맥경화를 일으킨 일, 국민 도덕의 저하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총 참회론이 히로히토에게 바쳐짐으로써 일본이 국가의 이름으로 행한 침략전쟁의 책임, 특히 중국을 비롯한 침략전쟁의 피해를 당한 광범위한 아시아 지역 사람들에 대한 가해책임을 회피하는 천황과 국민의 담합적인 담론상의 닫힌 관계가 구축되었다. 일군인 히로히토가 자신의 이름으로 만민에게 평화를 준다. 그것을 고맙게 받는 만민은 일군에게 전쟁에 패한 것을 참회한다. 외부를 완전히 배제하고 안쪽으로 닫힌 패전 책임의 거울에 비친 상과도 같은 구도가 히가시쿠니의 발언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이후 히가시쿠니 수상은 항복문서에 조인한지 나흘 후 열린 제88차 제국의회에서 종전에 이른 경의 개요보고를 하면서 일억 총참회론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이 보고는 극히 충실하게 종전조서를 기본적인 틀로 하면서 그 틀 안에서 정전(征戰) 4을 역사화하고 있다. 이는 전쟁을 태평양전쟁으로만 축소시키면서 만주사변 이후의 중국에서 치른 전쟁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이는 직접적인 패전을 안겨준 미·영 연합군에 대해서만 어쩔 수없이 항복한다는 인상을 가져다준다. 동시에 히로히토의 전쟁책임은 교묘한 수사를 통해 회피하고 있다. 히로히토가 정부에 대해 백방의 수단을 다하여 교섭을 원활히 매듭지으라는 편달을 내리셨고 참례한 제원 일동은 광대무변한 천황의 마음에 숙연하게 옷깃을 여미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라고 개전 전의 어전회의에 대한 정보를 매듭지은 다음 곧바로 천황 폐하의 이 마음은 개전 후에도 시종 달라지지 않고 항상 세계 평화의 확립에 대해 말씀해 오신바, 넓고도 깊이 염려하셨습니다.” 라고 잇고 있다. 다시 말해 히로히토는 전쟁과 사실상 무관하며 평화주의자였던 거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곧바로 이번의 새로운 사태의 출현에 의해 불행하게 우리나라는 비상조치로써 대동아전쟁 국면을 매듭짓게 되었습니다만, 이 역시 참으로 세계평화에 깊이 마음을 두시는 천황의 폐하의 인자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라고 종전조서가 천황의 마음에서 나온 인자한 마음으로 상찬되었다. 쇼와 천황 히로히토의 인자함과 신민에 대한 자애라는 고마운 은총에 의해 종전이라는 상찬이 주어졌다는 논리가 강조된 것이다. 이어 계속해서 현실을 전도하는 중요한 논리가 등장한다. 그것은 천황이 성단을 내릴 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괴로워한 일에 대해 신민측이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때의 반성은 천황의 마음을 괴롭게 했다는 그 자체에 대한 반성이다. 즉 전쟁 자체에 대한 반성이나 전쟁 피해국들에 대한 책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패전 직후 일본 지배층의 생각이 언론들의 8월 저널리즘으로 나타났고 815일은 오봉이 아니라 종전 기념일로 바뀌는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이상이 왜 92일이 아니고 815일이냐는 저자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에 대해 저자는 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전후체제 탈피를 위한 의도된 노력이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파악되는데 그 중 5319일 개봉된 영화 히메유리의 탑은 이러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일본에서 반전영화로 받아들여졌는데 내용을 보면 일본이 벌인 전쟁을 비판하는 내러티브가 아니라 - 물론 민간인과 부상병을 희생시키는 악한 군인들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일부의 잘못에 불과할 뿐 전쟁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 일본의 여성들이 전쟁을 통해 어떠한 피해를 입었는지 상기하는 전장 로망식의 그것이 반전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반전이라는 단어를 전면에서 내세우면서 스크린에 비쳐지는 것은 순진무구한 여학생으로 표상된 일본과 국가를 위해 죽는 자결행위의 상찬이라는 기존의 가치를 지키려는 보수적인 장면인 것이다. 또한 오키나와와 일본의 대립을 뛰어넘는 하나의 공동체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도 이 내러티브를 선호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미군의 공격에 습격당하고 희생당한 일본인과 오키나와인은 그 차이와 대립을 망각된 채 하나의 일본인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내러티브는 반복적으로 사용되며 일본의 피해자 의식 확산을 기여를 하게 된다. 필자가 글 서두에서 언급한 사진처럼 말이다.

이러한 매체들의 반응은 소위 55년 체제로 불리는 일본의 보수화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일본의 보수주의자들은 1958년 일본정부는 경제백서를 통하여 경제적 차원의 전후 종언을 선언했고 1980년대 나카소네 수상은 정치적 차원의 전후 종언을 의미하는 전후 정치의 총 결산을 내걸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본 내부에는 전후 체제가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평화헌법과 미일 안보동맹이라는 일본 국가의 제약이 따르는 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보수주의자들에게 전후체제는 허구적 세계이며 파괴되어야 할 세계이다. 보수정치학자 나카시니 데루마사는 전후체제가 평화헌법의 커다란 거짓위에 성립했다고 본다. 군사력 보유 금지와 전쟁 포기를 규정한 평화헌법 제9조는 완전한 거짓말이며 이러한 평화헌법 위에 성립한 전후 민주주의는 거짓말 위에 거짓말을 굳히는 작업이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전후 60년은 일본 문명의 생명력이 쇠락해온 문명사적 위기의 60년이었다고 진단한다. 문명사적 위기는 안전보장, 국민정신, 황실의 존재방식의 위기를 가리킨다. 일본의 보수정권은 이러한 일본 국가의 국제적 수동성을 극복하기 위해 보수의 국민화를 시도했다. 이는 특히 1980년대 나카소네 정권이 경제대국의 자신감 아래 국민적 자부심을 정치화하고자 했을 때 분명히 들어났다. 그리고 이는 역사 교과서 파동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일본의 침략진출이나 그 외의 다른 용어로 바꾸게 하고 난징대학살에 대한 기술은 환란중에 일어난 것이라고 쓰도록 수정하고 731부대 관련 기술은 삭제시켰다. 이는 국내외의 비판을 받아 80년대 후반 이후 다시 침략에 대한 기술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적어도 20년 이상 일본 청소년들에게 일본의 침략 가해사실을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교과서 파동은 96년 이후 새역모에 의해 다시 진행되었다. 비록 이는 국내외의 비판을 받아 채택율이 극소화됨에 따라 수면 밑으로 가라앉기는 했지만, 여전히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다.

여기에 덧붙여 저자는 이러한 일본사 교과서 문제에 대하여 특히 종전 기술의 변화에 집중하여 적고 있다. 이를 보면 55년 체제의 정착이 이루어지는 63년까지는 92일 종전 기술이 교과서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65년 이후에는 815일 종전 기술이 대다수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저자가 적고 있듯 세계사 교과서가 일본 표준에 의해 기술이 되는 기묘한 뒤틀림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왜 아직도 815일의 신화에 매달려 있느냐는 저자의 마지막 질문이 나온다.

이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 815일의 신화는 일본 보수층의 불안을 기저에 깔고 있는 것이다. 불안감의 원인은 일본 사회가 공동체적 윤리와 국가 의식을 상실했다는 판단, 미일 안보동맹과 평화헌법이라는 제도와 진보주의라는 이념으로 분식된 전후체제가 이를 초래했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일본국헌법 평화조항의 명분과 실제 사이에서 나타난 비틀림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전후체제가 만들어낸 체제 이데올로기와 실제 사이의 어긋남을 추궁한다. 비틀림어긋남은 전후체제를 부정하는 강력한 심리적 근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평화헌법의 제정의 강제성, 비주체성과 미일안보동맹의 보호성, 의존성이 국가로서 판단능력 상실, 국가의식의 약화를 초래했다는 인식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기저에는 완전한 주권체라는 주체의 문제가 깔려있다.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주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근대적 주체를 해체하고 역사적 국가관에 의존한 근대적 국가를 상정하려 한다. 강한 국가는 일본 보수주의자들의 탄생지이자 지향점이다. , 815일의 신화라는 허구에 매달려 있는 이유는 일본은 전쟁의 피해자이며 일억 총참회와 같이 반성을 통해 천황 아래로의 강한 국가의 재도약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적 국가의 구축은 협력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국제사회에서 결국 붕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자기를 보편으로 생각하는 역사관 및 세계관은 충돌을 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붕괴는 일본은 물론 주변 아시아 및 세계에 큰 파국을 다시 한 번 미칠 것이기에 그 문제점이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815일이라는 허구의 신화 추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815일을 당연하게 광복절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과연 815일은 우리에게 광복절인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일 선전포고를 통해 항전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럼에도 임정은 한반도 진공작전의 불발로 연합국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였고 한반도는 815일 수동적으로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우리는 일본에게 제대로 된 배상을 받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종군 위안부 문제나 독도 영유권 문제로 갈등을 계속 빚어왔다. 더욱이 815일 발표된 종전조서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쟁책임을 회피하고 식민지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의 피해를 회피한 것이었다. , 우리가 정치, 군사적으로는 독립을 이룩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815일 제대로 된 광복을 맞이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815일을 어떻게 생각하여 하는가? 혹은 그럼 광복의 시점으로 잡아야하는가? 그것은 논쟁이 심한 주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건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광복을 맞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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