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향 <<제국주의 : 신화와 현실>>
제국주의는 19세기 이후 지금까지 흔히 통용되어 오는 말이지만 그 범위가 넓고 방대해서 정확한 개념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것이 사실이다. 이에 박지향 교수는 본 책에서 ‘제국주의’의 핵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짓는다. 제국주의는 다른 집단에 의한 민족이나 인종의 통제이며 그 통제는 우선적으로 정치적이거나 경제적 통제이며, 국가들의 종속적 관계 성립과 유지를 의미하며 반드시 공식적인 영토의 통제를 포함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제국주의와 구별된다고 말한다.
이후 이어지는 여러 장을 통해 저자는 ,특히 1870년대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전개된 신 제국주의에 집중하여,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분석 등을 통한 제국주의의 여러 가지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 이 중 경제적 분석은 기존 학계에서 통용되어 온 수탈론적 분석에서 벗어난 보다 열린 시각을 보여준다, 기존 학계의 시각이 수탈구조를 통한 제국의 구조 형성에 초점을 맞추어진데 반해 제국의 유지에 경제성이 큰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다는 저자의 견해는 하나의 센세이션으로 다가온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식민지 수탈론이 최근까지 주류를 이루어 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기존 학계에서 통용되어온 식민지 수탈론은 탈 식민에 급급한 나머지 예정된 결론으로 의지된 도덕적 결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식민지 사회는 소수의 지배자와 다수의 피지배자로 구성된 사회였으며 이러한 사회구조는 상호간의 협력이 없이는 언제나 붕괴 가능한 구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서양의 식민지들은 물론이고 민족적 결집력이 강했던, 특이한 케이스인 식민지 조선의 경우에도 오랫동안 유지 될 수 있었던 것은 식민지 사회 내에서 저항은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저자가 규정하는 적극적 협력자이외에도 대다수의 일반 민중들이 저항을 하지 않았던 것은 식민지 이전 사회와 식민지 사회의 지배 구조가 그들에게 유달리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지배자가 외국인으로 바뀌었을 뿐 피지배자가 느끼는 수탈 구조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언정 큰 차이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리어 식민지 사회에 전개된 문명화의 산물들은 조금이나마 식민지 민중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그것들은 이전 사회보다 긍정적인 결과로 다가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식민 독립 후 성립된 국가 지배층들은 탈 식민을 통한 국가 정체성 확립에 나설 필요가 있었고 기존의 이러한 사실들은 어느 정도 무시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수탈론적 시각은 여타 정치적 상황과 결부되어 제국주의와는 또 다른 ‘민족주의’로 치달은 경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한 점에서 저자의 이러한 시점은 다소 적용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새로운 지점을 최초로 밟았다는 데에서 충분히 환영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제국주의가 경제적으로 제국에 큰 이득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면 제국들은 이러한 구조를 왜 계속 유지해나갔는가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제국주의의 문화적 측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측면을 살펴보기에 앞서 왜 이러한 측면이 도래되었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영국 제국주의는 1870년대 이후 어떠한 정파를 가리지 않고 널리 퍼지는 양상을 보였다. 제국주의는 보수당의 정치이념이었지만 동시에 자유당에게도 환영받았으며 심지어 공산주의 계열들도 제국주의에 동조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정파를 뛰어넘은 제국주의의 지지와 확산은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그것은 식민지야 말로 새롭고 활동적인 추진력을 제공받아 상처받은 남성성의 회복을 꾀할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백인 정착지에서 지주세력의 주도 아래 영국적 사회 위계를 만들고 영국식 전원 풍경을 조성하려는 움직임이 널리 포착된다. 이들은 시골저택과 농장, 사냥 그리고 도시의 클럽하우스 모국의 생활스타일을 그대로 재현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사냥은 영국의 군사적인 힘, 경제적인 힘, 정치적인 힘을 보여주는 위엄의 상징이자 고귀한 스포츠였다.역사가 멕켄지는 당시 사냥을 19세기말 식민지 지배의 제국적인 위엄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말했다. 제국의 시대에 사냥은 제국주의 국가의 남성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스포츠이자 유사시에는 국가적인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 용기 인내 개성을 육성하는 교육적인 성격도 갖추었다. 결국 식민지는 특히 여성과 원주민들의 열등함에 관한 가정에 기초하여 권력과 특권을 누리고 있는 백인 남성들 간 우애를 펼칠 수 있는 자유로운 장소로서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이러한 남성상은 그들 스스로 황소와 같이 일하고 굽히지 않고 실패하지 않으며 기계와 같은 정확성으로 그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으로 묘사하였는데 저자는 그러한 모습을 다 자란 사립학교 소년의 모습으로 표현하며, 빅토리아 말기의 남성성이 자기도취, 정서적 미성숙, 자기희생으로 점철된 것은 결핍된 남성성의 발현이라고 규정짓는다. 그리고 결핍된 남성성은 그러한 결핍성을 감추기 위해 문명화의 사명이라든지 위대한 국가의 건설이라든지 하는 거대 담론을 통해 우수한 백인들과 열등한 원주민들이라는 계층구조를 형성해내고 결핍성을 보충하려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식민지 지배에 내재된 젠더성은 여러 가지 측면애서 드러나는데 시인 키플링은 ‘노래(The song)에서 클라이브에 의해 정복된 도시 마드라스를 ’클라이브가 나의 입술과 눈과 이마에 입 맞춘다. 아 황홀한 키스여‘라고 표현함으로서 식민지에 투영된 복종적이고 애욕의 대상으로서 측면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식민지 정체성 형성은 ’수동적‘ 힌두, ’무법‘의 무슬림, 혹은 ’남성적‘ 펀잡인과 ’나약한‘ 벵골인 등의 모습을 통해 원주민들을 다양한 집단들로 분류하고 계층화함으로서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식민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인 원주민들의 신체적 기형에 집중하여 그들을 분류하고 지배자들의 상대적 우위성을 강화하려는 측면이 강했다. 이때 특히 활용된 것이 바로 성기(性器)였다. 크리스토프 마이너스는 몸을 통해 본 인종의 위계가 결국 성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측면을 분명하게 제시한 바 있다. 그는 소위 해부학적 사실로 지구상의 다양한 인종의 성기를 분류했다. 그에 따르면 예를 들어 동북아시아의 남성은 매우 작은 성기를 가진 반면 여성은 매우 큰 성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여성들이 자기 종족의 남성을 경멸하고 러시아인이나 코사크인들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성욕(性慾)은 19세기 유럽에서 가장 민감한 주제였고 그만큼 담론의 생산이 통제된, 감추어진 영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성기(性器)에 대한 집착은 성욕(性慾)을 수량화하고 위계를 매기기 위한 목적이 깔려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위계를 매기는 데 있어 왜 성기라는 몸의 특정부분에 주목했는가를 따져보자. 성기는 몸에서도 가장 보기 힘든 부분이다. 따라서 성기에 담론이 집중된 것은 이 보이지 않는 부분이 담론을 생산함에 있어 가장 통제가 용이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국주의의 직접적 시작은 문화적 동기가 아닐지라도, 그 확산의 기저에는 문화적 동기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체성을 부여하고 계층화한다고 해서 식민지 지배가 수월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차별적 요소는 결국 식민지 경영에 있어 제국에 큰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제국은 꽤 오랜 기간 유지되어 왔다. 그렇다면 제국은 어떻게 유지되었는가?그것은 바로 협력자들의 존재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기실 우리는 식민지 내 협력자 문제에 민감한 측면이 있어왔다. 그것은 독립 후 반민특위의 해산과 이후 유지되어온 식민지 협력자들의 정치, 경제적 지배력 등 적극적 협력파의 청산문제의 미해결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식민지 협력자들을 다룸에 있어 그들은 배타적 하나의 계층으로서 형성하고 다루어왔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저자는 저항을 하지 않으면 모두 협력자라고 보는 견해라고 비판을 가한다.
저자의 견해를 비롯한 최근의 연구 성과들은 협력자들에 대해 기존의 단향성 접근에서 양방향성 접근론으로 변화하고 있는데. 양방향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접근방법은 일방적으로 종속되고 지배되었다고 간주되어온 식민지 주민들을 보다 적극적인 행위자로 복구시키려는 의도의 발현이기도 하다. 그것은 나아가 식민지배자와 종속민 모두에서 다양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는 즉 지배자의 태도에는 동화와 배제라는 두 가지 방식이 동시에 존재했으며 종속민에게도 저항과 함께 지배자를 모방하려는 모습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방이라는 요소는 독립 후 새로운 국가건설의 임무를 떠맡은 탈식민 사회 엘리트들에게 있어 식민지배자들의 국가조직을 넘겨받아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것은 제국주의가 공헌한, 역사적인 아이러니라고 표현한다. 물론 이러한 표현은 식민 극복이라는 우리의 정서에 도전적으로 다가오지만, 강제적으로라도 자유주의 사회를 이식 받은 식민지 경험, 그것이 비록 형식적이라고 비판 받을 수도 있겠지만, 과 모방은 기존 봉건사회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법에 의한 통치’였으며 민족의 형성에 영향을 미쳐 새로운 국가 형성에 있어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국주의는 심각한 유산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것은 국가주의이다. 즉 제국주의가 국가 권력의 팽창현상이었다는 점에서 그 유산은 무엇보다도 국가주의의 발달과 강화로 나타났다. 제국주의에 저항한 사람들조차 국가주의의 유산을 답습하였다. 한편으로 독립의 요구가 외국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이었다면 다른 수준에서 그것은 이방인 지배가 취한 구조와 이념적 형태를 그대로 수용하고 확인하는 것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이 제국의 경험을 충실히 답습함으로써 독립 후 국가는 또 다른 억압적 존재로 부상하고 개인적 자유의 희생을 강요하는 현상이 야기되었다.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의 역사적 계승자이며 그것이 대체하려고 한 제국주의 전도된 이미지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36년에 이르는 오랜 식민지배 경험을 가지고 있다. 또한 징병, 징용 등 수많은 상해를 당했다. 그리고 독립은 식민지 내 저항과 상관없이 강대국들의 조정 속에서 갑자기 부여된 것이었다. 결국 우리 스스로 식민 경험에 대한 성찰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하지 못하고 감정적 결론에 치중한 바가 크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맹아론 같은 끼워 맞추기식 기술은 식민의 기억에 벗어나기 위한 태도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박지향 교수의 견해는 일견 도발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의 견해는 영국사에 집중된 것이고 그에 따른 보편적 해석은 다소 무리가 따른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의 견해는 일방론적 방향으로 흐르고 있던 학계의 논의들을 다른 방향으로도 볼 수 있게 방향 점을 던졌다는 점에서 충분히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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